루트 메탈리카 - 철의 시간, 역설의 장소 


을지예술센터, 서울
중구문화재단, 서울시 
Nov. 25 - Dec. 16. 2020

✤ 기획|조주리
✤ 협력기획 |이정은, 우혜진
✤ 참여작가 | 김동해, 김준, 변상환, 이학민, 전장연, 정성윤, 최황
✤ 시각디자인 | 물질과 비물질
✤ 주최 | 을지예술센터
✤ 주관 | 중구문화재단




전시 전경 exhibition view





전시 서문 preface 

전시 <루트 메탈리카- 철의 시간, 역설의 공간>은 셀 수 없이 다양한 물류와 인력, 무명 노동의 통로였던 을지로 골목들을 드나들며, 무엇인가를 부단히 만들고 어디론가 나르던 사람들에게 내려앉았던 남성적 형질과 단단한 촉각들이 마모되는 동안에 일어났던 일들과 사람들을 떠올리며 기획되었다. 사라진 존재와 곧 사라지고 말 세계의 모습을 조형 언어로, 굴절된 시어로, 관찰의 기록으로, 개인의 시선과 몸짓으로 옮겨가 보고자 한다.

전시를 구성하는 각 작업은 시간과 공간의 미메시스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다양한 층위의 메탈리카들 즉, 사운드, 빛, 움직임, 구체적 실천과 변화하는 정동을 표상한다. 메탈리카에 초대된 일곱 작가(김동해, 김준, 변상환, 이학민, 전장연, 정성윤, 최황)는 조형작업의 재료로 금속성의 물성을 진지하게 다루거나, 장소적인 배경으로써 을지로를 작업 안에 담고 있거나, 제작 공정상 을지로 생태계와 밀접하게 연계된 경우 등 다양한 입장을 대변한다. 그러나 한편, 꼭 명시적 근거만으로 선정된 것만도 아니다. 각 작가는 모두 장소와 재료를 다르게 해석하고, 상상하며, 작업의 실천 양상 또한 서로 상이한 좌표에 있다.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두드러진 작가 구성은 우선 ‘철’ 혹은 ‘금속’이 갖는 물성의 전형성과 제작자적 태도를 해체하여 바라보게 하기 위함이다

작업을 통로 삼아 더듬어 본 철의 시간은 을지로 골목이나 그 어딘가의 시간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힘차게 두드리며, 쉼 없이 쓸모 있는 것들을 만들어 내고, 거친 것들을 매끈하게 연마해온 시간이 있다면 그저 그에 합당한, 포괄적 수사일 것이다. 전시의 물리적 배경이 되는 을지로의 장소성과 골목 안의 존재들, 그들과 우연한 시공에서 맞닿을지 모를 창작자들의 고민과 실천들, 전시를 준비하고 만들어 가는 기획자, 활동가 사이에 얼마만큼의 오해와 혼선이 있을지 가늠하기 어렵다.

거세게 표면을 문지르고, 단단한 것을 쥐고 패며, 날카로운 쇳소리와 디스토션(distortion)을 부러 발생시키는 전설적 메탈 밴드 Metallica의 ‘쓰래시(Trahsh)’적 퍼포먼스는 과장을 조금 보탠다면 여러모로 산업 시대의 중공업과 반복적 노동의 현장을 떠올리게 한다. 전성기라 할만한 80-90년대의 높은 인기를 방어하지 못하고 새로운 트렌드에 밀려 한때의 음악으로 퇴조해 가는 수순 또한 골목의 융성과 쇠락을 덧입혀보게 한다.

골목 바깥으로 새 나가는 기계 소리의 볼륨이 커질수록 누군가는 온 신경을 다해 일하고 있다는 것. 밤 사이 해사한 안면으로 단장한 공간들이 밀고 들어와도 머지않아 도시의 운명과 함께 어디론가 밀려가고, 누군가는 딸려 들어온다는 것.

‘지금 여기’가 얼마나 역설적 장소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시끄러울수록 조용한 골목길, 여기가 ‘루트 메탈리카’다.

조주리 기획자




참여 작가 participated artists


김동해
<공생(共生) symbiosis>
mixed metal, 조경석, 전기재료, 모빌과 조명 설치, 2020

김동해가 구축한 금속성의 사물은 그 자체로는 독립된 오브제이지만 일상의 정경과 자연 풍경 안에서 비로소 금속 작업의 존재감과 장식적 쓰임, 형태적 당위를 주변과의 관계 속에서 상보적으로 구축해 낸다. 면적이나 볼륨이 아닌, 선형에 가까운 김동해의 작업은 온통 생경한 것들 사이를 고요하게 파고들며 자신만의 자리와 높낮이, 흔들림의 시공간을 탐색하듯 연결해 나간다. 재료가 갖는 응축이 강해질수록 배경이 드러나고, 사물의 정중동에 더욱 집중하여 응시하게 되는 구조를 김동해의 작업을 통해 깨닫게 된다.
작가는 을지로 안에서 벌어지는 다층적인 생산 사슬과 전시를 통해 드러나는 작업과 주변과의 관계적 구조까지를 포괄하여 이번 작업 전반에 “공생(共生)”의 의미를 부여한다. 부분의 마디와 마디를 통해 전체를 완성해 나가는 작업의 구조는 재료와 사물, 사람과 장소 사이의 비가시적 연결, 확장성을 떠올리게 한다. 





김준 
<다른 시간, 다른 균형>
11채널 사운드 설치, 앰프, 스피커, 사진, 이미지 북, 2020

사운드 작가로 알려진 김준은 장소가 담고 있는 다양한 사운드 정보를 발견, 기록, 분류하는 필드 리서처에 가까워 보인다. 작가는 물질로서의 금속성을 시각화하거나 장소의 특수한 서사를 청각적 정보로써 종합하지 않는다. 2016년 작가는 을지로에 위치한 개인 작업실에 머물면서 주변의 장소들을 빈번하게 오가며 다양한 시간대의 사운드와 이미지를 채집한 바 있다. 이러한 수집 행위는 결과적으로 25개 채널의 사운드 아카이브, 150페이지에 달하는 사진집을 구성할 정도의 방대한 라이브러리가 되었고, 이는 작가의 예술 실천에 있어 중요한 근간이기도 하다. 2016년 작가가 선택한 작업의 표제는 <다른 시간, 다른 균형>이었는데 4년의 시간이 지난 오늘의 시점에서 새롭게 소환되어 구성된 <<다른 시간, 다른 균형>>에 또 한 번의 괄호를 치게 된다. 전시를 위해 재구성한 사운드 중에는 하루를 시작하는 노동자의 기도, 앵무새의 지저귐, 하수 소리 등 지역의 밖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다채로운 소음과 리듬으로 가득하다. 애써 그러모은 소리의 파편들은 그때 그곳을 기록하고 기억할 뿐, 지금의 시간과 여기의 균형은 더 이상 붙잡을 수 없다.




변상환
<Live Rust>
가변설치, 방청 페인트, 종이, 형강 활자 인쇄, 2020

풍경의 틈새에서 자연물처럼 존립해 온 인공 사물의 역학과 생김새, 변성의 역사를 탐구해온 변상환에게 도시, 특히 쇠락해 가는 도시의 속내는 흥미로운 탐색 지대다. 사멸의 순간까지 반짝이는 것 혹은 반대로, 살아있지만 썩어 있는 것 같은 물질상태는 작가의 눈에 포착되는 중요한 지점이다. 동시에 우리가 거주하며 사는 도시의 운명 그 자체이기도 하다. 최근 변상환의 작업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물질인 방청 페인트와 금속 형강은 썩을 수도 있는 금속(자연재료)과 썩지 않도록 해주는 도료(인공물질)라는 물성의 아이러니컬한 대치를 잘 보여준다. 변상환은 온전히 자신의 육체적 완력에 의지하여 적갈색의 방청 페인트가 묻은 다양한 모양의 형강을 종이 위에 옮겨가며 다양한 패턴을 남기는 작업을 해나가고 있다. 강인한 물성은 그것이 이동한 궤적이 겹쳐 만든 면적으로만 남게 된다.
‘살아 있는 녹’(Live Rust)이라 명명한 작업은 가수 닐 영(Neal Young)의 공연 타이틀인데, 재료의 선택에서부터 제작 과정, 최종 결과물에 이르기까지 이미 여러 쌍의 역설이 발생하는 변상환의 작업에 대한 매우 적확한 수사가 아닐 수 없다.
 




이학민 <호기심의 집 House of Curiosities>
가구 및 오브제, 가변 설치, 2020

세운상가에 작업실을 두고 있는 이학민은 을지로 일대의 목형, 주물 그리고 가공을 하는 장인들과의 협업을 통해서 대표적 작업 시리즈인 파우 가구 시리즈 (Paw Furniture Series)를 제작해 왔다. 계승된 전통미감도 복각된 레트로 풍도 아닌 이학민의 금속 작업은 외계적이다.
알루미늄 주물 기법을 활용하여 다양한 디자인적 프랙티스를 전개해 나가고 있는 이학민의 작업은 전시 출품작 가운데 가장 물성이 두드러지고, 볼륨이 큰 작업이다. 두드러지는 금속성의 질감과 물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업이 지나치게 남성적이거나 기념비적이지 않은 이유는 개별 작업이 갖는 독특한 형태미와 그것들끼리 어우러진 공간에서 발산되는 낯선 광채와 온도, 촉감과 같은 총체적 감각에 있다. 작업이 성취한 독자적 좌표는 공예와 디자인, 동시대 미술과 서브 컬쳐, 럭셔리 브랜드와 스트릿 브랜드의 요소들을 두루 수용하면서도 그 어떤 것의 전형도 피함으로써 획득한 결과처럼 보인다.




전장연 <숨을 고르고, 정지 (Pause)>
철근, 스프링, 운동기구 악세서리, 쇠사슬, 석고, 가변크기, 2020

‘긴장 속의 균형’이라는 물리적 조건을 조각적 설치 안에서 실험해 온 전장연에게 금속성은 경화된 물성이 아닌 휘어지고 구부러지며, 물체를 매달고 멀리 튕겨내는 장력이 내재된 상태로써 적극 탐색되어 왔다. 공간을 3차원의 캔버스 삼아 그 위로 자유롭게 배열하고 매달아 놓은 조각적 사물들은 정밀하게 계획된 풍경이기 보다는 보이지 않는 힘이 팽팽하게 모였다 풀어지는 운동‘장(field)’에 가까워 보인다. 특정한 물성을 이해하고 다루는 데 있어 필요한 제작자의 힘과 제어 능력, 대상과의 관계적 요소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메탈 조각이 전통적으로 남성중심의 제작 영역이었다면 전장연의 시도는 정지된 공간 속에서 극도로 예민하고 위태로운 밸런스 구축과 와해를 시도하고, 철이 가진 또 다른 물성을 끄집어냄으로써 작업적 변별을 이룬다. 작가 자신에게는 세계의 보이지 않는 수평 수직적 교점을 더듬으며, 서로 맞대며 기대고 있는 존재들의 균형감각을 확인해 보는 순간이기도 하다.




정성윤 <GOOD-BYE>
세 개의 바퀴, 기어, 알루미늄, 120x120x220cm, 2012 외

정성윤의 작업은 일종의 고안된 기계장치지만, 그것들로부터 기능과 형태, 관계적 서사로 이어지는 디자인적 합목적성을 유추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완전무결해 보이는 작품의 질감과 산업적 양감, 탈 없는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업은 간혹 꺼져있는 기계처럼 사물의 표정과 미션이 소거된 듯 보인다. 그러나 뜨겁고 차가운 수차례의 경화 과정을 지나 더 이상의 확장도 수축도 없을 검은 몸체 안에 여러 단계의 심리적 투사와 형태적 번역이 일어났을 가능성을 투영해 본다. 이윽고, 앙다문 철면에도 독특한 페이소스와 내면의 드라마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전시에 출품된 세 점의 작업들은 2012년과 2015년 사이의 것들로 작가 개인의 서사를 얼마간은 담고 있는 작업이다. 는 을지로 골목의 기술자에게서 얻은 여성용 자전거 안장을 이용해 만든 의자로, 매력적이지만 편안히 머물 수는 없는 존재에 대한 뜨거운 냉정을 담고 있다




최황<사건 지평선 Event horizon>
싱글채널 비디오, 9분 25초, 2019

골목의 내밀한 풍경을 담기보다는, 골목 바깥 대로변의 교통, 지형 데이터를 활용하여 타임랩스 영상을 새롭게 구성한 최황은 내부의 공간을 접근 불가한 상태로
설정하고, 외곽만을 반복·순환하는 역설적 태세를 취한다. 2019년 을지로 재개발 이슈를 전면에서 다루었던 작가 주도의 기획전(‘박원순 개인전’, 상업화랑, 2019)에서 선보인 적 있는 <사건 지평선 (Event Horizon)> 총 10여 년간의 을지로 일대의 변화 과정을 인터넷에서 제공되는 지형 정보만을 활용하여 담담히 영상의 리듬을 이끌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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